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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1]이태엽, 80년대 대형 스트라이커 활약
기사입력 2011-03-02 오후 2:18:00 | 최종수정 2011-03-08 오후 2:18:59

2010년 1월 용인시축구센터 소속 원삼중 축구부 감독으로 4년만에 다시 중등축구무대로 복귀한 이태엽 감독. 그 해 복귀신고식은 너무나도 거창했다. 제1회 여주세종대왕배 우승을 시작으로 오룡기대회 준우승, 왕중왕전 준우승으로 화려한 복귀 신고식을 마쳤다. 

현재 원삼중 축구부 감독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이태엽은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공격수를 대표했던 선수 중 하나이다.

이태엽은 11초7의 빠른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력과 특히 가공할만한 위력적인 슈팅은 상대 수비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당시 신장 181cm에 체중74kg의 듬직한 체구는 대형 스트라이커로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 탁월한 위치선정 등으로 공격진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80년부터 대표팀에서 뛰기 시작했으며, 1981년 화랑(대표 1진) 소속으로 월드컵 아시안 예선전에 참가, 쿠웨이트전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동점골을 빼앗겨 본선 진출에 실패한 일화는 지금도 축구계에 회자되고 있다. 

만약 당시 심판이 노골을 선언하지 않았다면 이태엽은 한국축구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한 명의 선수로 인생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이태엽은 은퇴 후에는 목포해운항만청을 시작으로 장안중, 호남대, 광주상무, 원삼중을 이어가며 후배 양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고1때 시작한 축구, 하루하루가 달라져

전남 영광군 대마면 남산리 600번지의 이건주 씨 장남 이태엽은 학교에서 재주꾼으로 소문나 있었다.

영광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악단장을 맡아 학교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고 5학년이 되면서 학교대표로 육상선수, 축구선수로 발탁돼 다재다능한 소질을 발휘했다.

영광초등학교 악대부를 전남대회에서 1등 시킨데 이어 대전에서 열린 소년체전 전남대표 축구팀으로 출전하여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이름을 떨쳤다.

영광군 교육청에서 근무하는 아버지가 낡아빠진 축구공 1개를 태엽에게 선물하는 바람에 축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틈만 나면 동네 꼬마들을 모아 볼을 찼지만 축구선수가 꼭 돼야겠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단다.

초등학교시절은 악대부와 축구부에서 제법 이름을 떨쳤지만 해룡중에 입학하면서부터 축구에만 열을 올렸다. 중학교 때 영광군 라이온스클럽 장학생이 되어 장학금을 받았고 학교 측에서도 축구부 특기생으로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좀 더 큰 도시(광주)로 가서 축구를 해보고 싶었다. 기껏해야 군(郡)에서 활개 치는 우물 안 개구리였으니 넓은 곳에서 뛰어보고 싶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금호고 전성시대의 가장 무서운 센터 포워드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75년 해룡고 1학년 때 금호고 서현욱(現 호남대 감독)감독으로부터 테스트를 한번 시켜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 갈 것만 같았다. 꿈에 그리던 인류선수가 잘만하면 될 수 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테스트를 기다렸다. 그때가 바로 금호고 창단 시기였다.

2~3학년은 재학생들이었고 1학년생은 중학교 우수선수로 인정받아 특기생으로 뽑힌 선수들이었다. 서현욱 감독이 이태엽을 발견하게 된 동기는 해룡중학교에 다닐 때 유난히 발이 빠르고 체력이 좋아 언젠가는 한번 써먹어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소년체전 전남대표로 출전하여 발군의 실력을 보였기 때문에 비록 시골에서 큰 선수지만 장래성이 밝다고 테스트를 요청했던 것이다.

금호고에서 테스트를 시킨 뒤 곧 바로 전학을 요구, 드디어 금호고 축구부팀에 합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태엽은 사실 시골에서 흔히 말하는 ‘촌놈축구’를 했기 때문에 뛰어나는 평은 못 받고 그냥 발전할 수 있는 선수로 평가 받았다.

자기실력으로 보아 도저히 다른 선수들을 능가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이태엽은 그때부터 하루 4차례씩의 피땀 나는 훈련에 들어갔다. 그런 결과 하루가 모르게 기량이 좋아졌고 전국대회에서 꼭 두각을 나타내야겠다고 다짐했다.

76년 고교춘계연맹전에 출전하여 창단 2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코치가 젊은 체육교사로 있었기 때문에 선수들과 일심동체가 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준우승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은 당시 강호로 불리던 서울체고와 신흥실고를 각각 3-0, 2-0으로 대파하고 동래고와 한양공고를 승부킥으로 물리치고 결승전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비록 결승전에서 대신고에 0-1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지만 처음으로 맛본 전국대회 준우승의 쾌감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최우수상 뺏긴 아픔 아직도 남아 있어

76년은 금호고의 해였다. 봄에는 서울에서 준우승하고 여름에는 부산 MBC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고 가을에는 부산일보 주최의 청룡기대회에서 드디어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 대회에서 이태엽은 센터 포워드로 기용되어 가장 두드러진 유망주로 어필되었고 금호고의 핵심적인 공격수로 발판을 굳혔다. 그런데 최우수선수상을 동료에게 빼앗겼다. “선생님이 원망스러웠어요. 관중들도 저의 플레이를 보았고 저 또한 제가 최우수선수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만 다른 동료가 받더군요.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잘된 것 같아요. 만약 제가 그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면 아마 나중에 더 큰 선수로 성장하지 못할 수 도 있었어요.”

이태엽은 꾸준하게 또 성실하게 볼만 차는 일개 축구선수 밖에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굴 탓하고 평가하기보다 자신이 바라는 국가대표가 될 때까지 열심히 선생님이 시키는 데로만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고3때 금호고에 거는 기대는 자못 컸다. 1학년 때부터 발을 맞춘 금호고 일레븐이 3학년이 됐기 때문이다. 첫 대회인 대통령금배에 출전하여 동대문상고와 1회전에 격돌했다. ‘전국최강’이라는 매스컴의 화려한 후광을 업고 금호고는 이태엽 혼자 2골을 기록하는 수훈에 힘입어 동대문상고를 2-0으로 가볍게 물리쳤다.

금호고는 너무 자신만만한 여유를 보이다가 이 대회 우승을 차지한 동아고에 승부킥으로 나가 떨어졌다. 전력이 꼭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님을 입증시켜 준 것이다. 이태엽의 마지막 고교시절은 별로 화려하지 못했다.

태엽 1년 전에 이미 스카우트 싸움에 시달려

이태엽은 77년도 전국 최강의 팀으로 불리던 광주 금호고의 창단멤버다. 이미 고2때 각 대학, 실업, 팀 감독들의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3학년이 되면서 ‘이태엽 쟁탈전’은 더욱 불붙기 시작했다.

78년 10월.

부산일보 주최 청룡기전국고교축구대회 2연패를 꿈꾸던 금호고가 부산에서 묵고 있을 때다. 예선 1회전에서 이태엽이 혼자 2골을 넣어 부산남고를 2-0으로 쉽게 이기고 2회전에 올라 영남상고 역시 1-0으로 격침 시켰다. 2연패의 꿈이 서서히 익어가는 듯 금호고는 여유를 보이며 준결승전 부산상고와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서울시청 박종환 감독이 금호고를 찾아와 서현옥 감독를 만나 이태엽은 서울시청으로 이미 결정됐으니 그렇게 알라고 했다. 사실 그 당시 금호고 서 감독도 그 대회를 끝으로 동아대로 옮겨 가기로 되어 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태엽을 데려갈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사자인 이태엽은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이 보내주는 곳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와 구두약속이 된 서울시청으로 진로가 확정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대회에서 부산상고에 0-1로 패해 2연패를 놓치고 이태엽은 서울시청으로 와서 훈련을 받았다.

“사실 그때 너무 괴로웠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해본 적이 없었는데 동아대 감독으로 가신 선생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서울시청으로 오게 된 당시의 괴로움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 밑에서 훌륭한 대선수가 되어 달라고 하실 땐 눈물이 나오도록 고마웠습니다. 저는 서울시청도 동아대도 솔직히 다 싫었어요. 고려대를 가고 싶었던 게 그때 당시의 심정이었으니까요”

이태엽은 스카웃 당시의 괴로운 심정을 이렇게 말하면서 이제까지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지만 많은 선생님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유명선수가 겪는 지도자와의 갈등이 이태엽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제자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 훌륭하게 되어 주기를 바라는 스승의 교육적이고 인간적인 이해가 있었기에 본인 이태엽은 손톱만치의 고통도 없었다면서 서현욱 감독께 지금도 감사하다고 한다.

고통이 있었다면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라고~

이태엽을 잡아라! 슈팅감각 뛰어난 천부적 골 게터

근래에 찾아보기 힘든 빠르고 골 잘 잡는 신예가 나타나 눈길을 끌고 있다. 신장 181cm, 체중78kg 거기에다 11초7의 스피드를 가미 한다면 단연 국내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아닐까.

80년대 들어 가장 기대되는 유망주로 손꼽힌 선수는 바로 서울시청의 백넘버 10번 이태엽 이다.

이태엽은 서울시청의 박종환 감독이 길러낸 국내에서 가장 완벽한 스트라이커로 각광 받았다. 당시 서울시청의 평균득점 40%를 기록하는 천부적 골 게터이자 11초7의 초특급 스피드를 지닌 181cm, 78kg의 우람한 체격으로 단연 상대팀의 위협적 인물이었다.

이태엽의 슈팅은 강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골문을 조준하는 것이 특징이다. 스피드를 이용한 중거리 슈팅은 가슴이 후련해지도록 통쾌한 맛을 풍긴다. 실업 2년생의 초년병으로 춘계실업연맹전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모조리 따돌리고 당당 최고 득점상을 획득하는 등 80년대 들어 가장 진주처럼 빛나는 플레이어로 각광 받았다.

80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현재 FA컵으로 전환 )최우수선수상과 81~82년 Korea Serise 최다득점상 수상까지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대표팀에서도 맹활약으로 펼치며 81년 체육특기자 병역특례법 혜택을 받아 국가로부터 군 면제 조치를 받았다.

박종환 감독에게 꾸지람 듣고 울면서 혼자 연습

서울시청으로 온 이태엽에게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한 박종환 감독은 처음부터 견디기 어려운 과격한 훈련으로 이태엽의 기를 죽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교 때는 자기가 제일 잘한다는 소릴 들었지만 이때부터 그 반대 입장이 됐으니 심적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알만하다.

하는 것마다 꾸지람만 듣고 잘한다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었다. 차라리 다른 팀으로 갔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이 바로 박종환 감독 식의 색다른 지도방법이다.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지적할 곳은 헤아리기 힘들다. 그래야 자만심을 버리고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더욱 높은 실력을 쌓는데 열중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더 이상 필요의 가치가 없는 선수로 낙인찍히고 만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통스런 훈련이 이태엽을 새로운 인간으로 갱생시켰다. “아주 미칠 것만 같았어요. 제가 하는 것 모두가 박 선생님께는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보이니 나중에는 제풀에 지쳐버렸어요. 잔소리는 나 혼자 맡아 놓고 들었고 아무리 잘해도 칭찬 한번 못 들었어요. 그럴 때마다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대신에 자꾸만 서러운 생각이 들어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기도 많이 했답니다. 이제 생각하니 그때는 제가 어리기 때문에 이해를 못한 것 같습니다. 박 선생님이 잔소리와 온갖 구박을 제게 주었기 때문에 훗날 대표선수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충무(대표 2진)팀에 선발 될 때 자신감 얻어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동시에 이태엽은 국가대표 2진인 충의팀에 선발되어 태국 방콕에서 열린 킹스컵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국제경기 경험도 처음이었지만 그보다 라이터 경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열대지방이라 꼭 밤에만 경기가 있었고 첫 경기인 인도네시아 전에 스타팅 멤버로 출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태엽의 플레이는 예상보다 훨씬 저조하여 한국이 6-0으로 크게 이길 때 단 1골도 넣지 못했다.

볼의 스피드를 간파하지 못해 매 번 실수를 저질렀고 어떤 때는 배꼽을 잡는 에피소드까지 노출시켜 코칭스태프를 실망시켰다. 이러한 이태엽의 실수 때문에 그다음 경기부터는 반계임만 출전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심정을 누구하나 이해해 줄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 결승전인 태국과의 경기때 이태엽은 스타팅 멤버로 출전했다. 비록 0-1로 태국팀에 패했지만 한국선수 중 가장 잘 뛰었다. 앞 선 경기에서 너무 어이없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에 혼자 밤늦게 적응훈련을 한 결과 마지막 경기를 잘 뛸 수 있었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해외원정경기를 다녀왔지만 가장 많은 것을 배웠고 축구에 눈을 뜰 수 있는 기회였다.

80년 5월 화랑(대표 1진)팀에 발탁

79년 실업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명성을 쌓은 이태엽은 그해 춘계실업연맹전에서 5골을 넣어 최다득점상을 받았지만 컨디션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부산 전지훈련때 연습경기 중 발목을 다쳐 치료 받다가 대회 1주일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예선전 3게임 모두 전반전만 뛰고 후반전에 교체 됐지만 대 포항제철전에서 2골, 대 상업은행전에서 1골을 넣어 무난히 서울시청이 결승토너에 진출하는데 수훈을 세웠다. 결승토너 1회전에서 기업은행을 만나 문전 30m지점에서 얻은 직접 프리킥을 다이랙트로 성공시켜 선취점을 빼냈다. 이태엽의 이날 슈팅은 관중들 역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위력적이고 정확했다.

서울시청에 이태엽이 없으면 골 잡을 선수가 없다는 말도 있음직하다. 매 경기마다 1골 아니면 2골씩 잡아 버리는 슈팅의 제1인자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청의 간판스타로 자리를 잡은 이태엽에게도 고칠 점은 많았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력과 슈팅은 일품이지만 키에 비해 헤딩 제공권이 약하고 개인기가 아직 덜 다듬어 졌다는 게 박종환 감독의 평가였다. 그러나 이태엽의 날카롭고 천부적인 슈팅력만큼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비장의 무기였다.

당시 국가대표 화랑팀의 스트라이커 부재는 이태엽과 같은 유망주를 일찍 발굴하여 키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공포의 스트라이커로 각광 받으며 80년 5월 국가대표 1진 화랑팀에 승선하게 됐다.

잊지 못하는 한 골, 한국축구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이태엽은 79년 국가대표 충무(대표 2진)팀으로 맨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킹스컵 국제축구대회를 시작으로 80년 화랑(대표 1진)멤버로 아시안컵, 대통령배축구대회, 메르데카국제축구대회, 한. 일정기전 등에 출전하며 83년까지 대표팀 1진으로 활약했다. 이 기간 동안 국위선양을 펼치며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태엽에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단 한 골이 있다. 82년 제12회 스페인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지역예선전을 펼쳤다.

아시아 3조에 속한 한국의 상대는 홈팀 쿠웨이트와 말레이시아, 태국이었다. 지역예선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 멤버는 다음과 같다.

김정남 감독을 필두로 골키퍼에 조병득, 김황호 수비에 조영증, 박경훈, 권오손, 박성화, 장외룡, 홍성호 미드필더에 이강조, 조광래, 이태호, 이영무, 박항서 공격진에 정해원, 조긍연, 최순호, 오석재, 이태엽, 황석근 등 이었다.

81년 4월21일 한국 화랑팀은 말레이시아와 첫 경기에서 2-1로 승리했다. 전반32분 최순호의 도움으로 홍성호가 헤딩골을 성공시켜 앞서기 시작했다. 6분 뒤인 38분에도 이강조가 오석재의 패스를 받아 20m 넘는 슛으로 추가골을 터뜨렸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대량득점을 쏟아 부으며 최순호 2골, 이태호, 최종덕, 오석재가 1골씩을 보태 태국을 5-1로 대파했다. 한 팀만이 최종예선에 나가게 되는 3조에서 이제 한 경기만 남겨놓은 상태, 상대는 홈팀 쿠웨이트였다. 쿠웨이트도 역시 2연승을 내달리며 한국과의 최종전을 준비했다.

모든 것이 한국에게 불리한 상태로 쿠웨이트의 홈 관중들은 경기 전부터 열광적인 응원전을 펼쳤다. 그렇게 주심의 휘슬소리와 함께 시작된 3조 마지막 경기, 이날 주심으로 배정된 콜롬비아 길 베르토는 경기 초반부터 한국에게 불리한 판정을 연 거푸해서 내렸다. 하지만 한국팀의 경기운영 능력이 돋보이며 전반을 0-0무승부인 가운데 마무리했다.

하지만 후반 들어 쿠웨이트의 역습으로 알 안바리 선수에게 첫 골을 내줬다. 만회골을 위해 한국이 반격을 계속하던 중 후반29분 코너킥 찬스를 얻었다. 이강조가 코너킥으로 반대편 골포스트 쪽으로 넘겨준 볼을 이태엽이 달려들며 헤딩으로 득점했다.

그런데 길베르트 주심이 노골을 선언, 이태엽이 뛰어들면서 상대 골키퍼를 밀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태엽이 헤딩하는 순간 쿠웨이트 골키퍼는 5~6m 떨어져 있었고 다른 상대 선수들도 이태엽과 접촉한 선수는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판정에 이태호가 거세게 항의하다가 퇴장까지 당했다.

이때부터 한국선수들은 사기가 떨어져 경기의 흐름을 조절하지 못하고 결국 후반36분에 알 가넴 선수에게 또 한 골을 빼앗겨 2-0으로 패했다. 이태엽의 동점골을 석연찮은 판정으로 한국의 패배로 내몰고 말았다.

지금도 축구인들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 당시 이태엽의 골이 인정돼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면 이태엽은 ‘축구영웅’으로 한국축구 역사에 길이길이 남았을 거라고..

지도자로 변신 우승 제조기 감독으로 불러

이태엽은 83년 수퍼리그 출범과 동시에 서울시청에서 국민은행으로 이적 3년간 프로무대에서 활약한다. 하지만 부상으로 크게 빛을 내지 못하고 85년 돌연 은퇴, 88년 목포항운노조 축구부 코치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지도자 생활에 젖어들지 못하고 이후 약 10년 이상 그라운드를 떠나 개인사업으로 세월을 보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태엽은 2000년 1월 서울 장안중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그라운드에 복기한다.

장안중축구부를 맡아 천안 오룡기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대회에서 상위 입상을 거두며 선수시절 못지않은 지도자로서 서서히 빛을 밝히 하기 시작했다. 2007년 호남대 감독으로 부임한지 10개월 만에 전국대학선수권대회를 석권한 뒤 2008년에는 전국춘계1.2학년대학축구대회에서 준우승에 입상했다.

이후 개인적인 사유로 호남대 감독을 그만두고 광주상무 프로축구 경기분석관으로 있다가 용인시축구센터 원삼중의 제의를 받고 지난해 2월 4년 만에 중등축구무대로 다시 복귀했다. 복귀무대로 4월에 여주군에서 열린 제1회 세종대왕배축구대회 원년 챔피언에 등극하며 화려한 복귀신고식을 했다.

이후 주말리그제와 전국대회에서 팀을 상위입상으로 이끌며 용인시축구센터의 옛 영광을 재현시키는 데 앞장섰다. 오룡기 전국중등축구대회 준우승과 왕중왕전 준우승은 그동안 침체기에 빠져있던 용인시축구센터의 부활을 알렸다.

이태엽 감독은 지금도 지난 왕중왕전 결승전 경기를 떠올리며 아쉽게 패배했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고 하며 다시 한 번 도전하겠다는 강한 포부를 밝힌 가 동시에 올해는 경기도대표로 소년체전에도 출전해야하는 만큼 체전 우승에도 욕심을 내겠다고 했다.

“강압적인 지도 방식을 피하고 자율적인 훈련 방법을 실시하되 탄탄한 기본기를 중시하면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습니다. 촘촘한 수비력과 공간을 창출하며 넓게 전개하는 공격력, 슈팅에 버금하는 강력한 패스를 구사하는 콤팩트한 축구를 지향하고 싶습니다”라고 자신의 지도철학을 전달했다.

이태엽 감독은 현역시절 실업축구,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면서 최우수선수상과 최다득점상 등을 받았고 지도자로 변신한 후에는 중등-대학-프로까지 접하는 폭넓은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축구인으로 성공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2002년부터 4년간 한국중.고축구연맹 기획이사를 맡아 학원축구 행정 경험도 쌓은 이태엽 감독은 U-15서울시대표팀 감독과 U-14중등연맹 대표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0년 KFA(대한축구협회) 1급 지도자 라이센스, 2008년 7월 AFC(아시안축구연맹) A급 지도자 라이센스를 획득,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는 지도자로 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 감독은 슬하에 지현(대학2년생), 지수(고2)양 등 두 딸과 광양제철중 3학년 축구선수인 아들 승환 군을 두고 있다. 이 감독의 동생 이형엽씨는 서울대 졸업 후 광희중 체육부장(축구부장)으로 재직 중으로 축구인 가족이다.

화려한 선수생활, 이제는 지도자로서 한국축구 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이태엽 감독, 아련히 떠오르는 옛 추억은 일기장 한 곳에 차곡차곡 남기며 또 다른 축구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오늘도 그는 진정한 승부사로 오직 축구를 위하여 살아간다고 한다.


[ksport TVㅣ황 삼 진 기자] sj121020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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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투표 Poll
Q: 6월 전국 고교축구대회가 전국 6개 지역에서 일제히 개막됐다. 그런 가운데 학부모들과 대회관계자들로부터 대회운영에 따른 불편한 점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가장 문제시 되는 점이 있다면?
심판 편파판정
대회운영 미숙
바가지 상혼, 불친절
욕설, 폭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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