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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감독님, 이 글귀 보셨습니까?
기사입력 2011-04-19 오후 7:30:00 | 최종수정 2011-04-19 오후 7:30:35

경기 시작 후 96초만에 터진 김재웅의 첫 골 순간!  ⓒ 심재철

허정무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2004년 3월 1일 감바 오사카와의 창단 기념 친선경기부터 인천월드컵경기장(문학경기장)을 꼬박꼬박 찾아가고 있는 인천 유나이티드의 팬입니다. 우선 17일 성남전에서 2011 정규리그 첫 승리를 이끌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규시간 90분을 지나 추가시간 1분 16초 만에 박준태 선수가 이마로 넣은 골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감독님이 새로 오셔서 치른 경기 중에 비교적 여유 있게 앞서고 있다가도 동점골을 내주거나 역전 결승골까지 내줬던 경기를 떠올리면 정말 놀라운 변화요,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는 더 기뻤습니다.

울산에서 데려온 박준태 선수는 자신에게 노란 딱지가 주어질 것을 알면서도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득점 뒤풀이를 펼쳤습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그랬겠습니까? 그 마음 경기장에서 "인! 천!"을 외쳐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반전의 한 골 지키기, 그러나...

그런데 어제도 어김없이 동쪽 관중석에 앉아 있던 저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후반전을 보는 내내 마음 속으로는 방문팀 성남 천마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방문팀의 노란 옷 서포터는 아닙니다.

이처럼 잠시나마 성남을 응원했던 이유는 전반전 중반 이후 인천이 추구한 '한 골 지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의도와 경기 흐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30라운드까지 이어지는 리그 특성을 생각할 때, 이는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인천 유나이티드가 추구하고 있는 '3-5-2' 또는 '3-4-3' 포메이션이 정상적으로 가동된다면 측면과 중앙의 조화가 이루어지면서 박진감 넘치는 축구를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인천 경기를 보면 왼쪽의 디에고나 장원석, 오른쪽의 전재호나 안태은 등 측면 미드필더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수비적인 부담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성남 경기의 매치 리포트 ⓒ 한국프로축구연맹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수비수가 다섯 명이나 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매치 리포트 화면을 열어 보니 기록원께서도 저와 같은 눈으로 인천 선수들의 포지션을 표시했나 봅니다. 분명히 인천의 DF 자리에는 다섯 명의 이름이 나란히 써 있습니다.

작지만 유능한 미드필더 바이야 혼자서 외롭게 MF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의 소중한 활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구요. 지난해 남아공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이름을 날린 북한 축구대표팀의 '5백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축구팬들을 경기장에서 내쫓고 있는지 알 만한 축구팬들은 다 알 것입니다.

전반전,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오른쪽 코너킥 ⓒ 심재철

오죽하면 인천의 2009년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던 제가 방문 팀 성남의 동점골을 간절하게 바랐겠습니까? 저와 제 축구 친구의 간절한 바람이 통했던 것일까요? 인천은 78분에 동점골을 내줍니다. 홍진섭 선수의 재치있는 넘겨차기가 비어 있는 인천의 골문에 떨어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아마도 그랬다면 주변의 인천 팬들로부터 야유를 들었을 것입니다. 참았습니다.

참 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허정무 감독님은 동점골을 내주기 바로 직전에 공격수 김명운을 빼고 수비형 미드필더 조범석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동점골을 내준 것이었습니다. 축구팬들이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잠그기'라는 안티 축구 용어가 떠오르는 순간에 골을 내준 것입니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그리고 오늘(18일) 점심 시간에 케이블 TV 생중계 화면을 틀어보다가 기막힌 말을 들었습니다. 해설자도 아니고 캐스터분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널티)박스 안쪽에 다섯 명의 선수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쓰리백이 아니라 파이브백입니다. 인천의 수비 라인 보세요. 열한 명 전원 수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천이 동점골을 내주기 직전의 상황 설명이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 글귀 보셨습니까?

'WC 영웅, 리그 승 ×'이라는 글귀 ⓒ 심재철

일요일 낮 봄 기운을 맘껏 느끼며 자전거를 타고 약 70분 가까이를 달려서 문학경기장에 도착했습니다. 선수들은 몸을 풀고 있었고 시작 시간까지는 약 30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전에 없던 글귀가 서쪽 관중석 한복판에 걸려 있었습니다. 작은 글씨였지만 건너편 관중석에서도 잘 보였습니다. 그래서 전 가지고 다니는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WC영웅 리그 승 ×'이라는 간단한 글귀였습니다.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 등이 드나드는 출입구 바로 위였기 때문에 아마도 보셨을 것입니다. 기분이 꽤 나쁘셨겠지요. 일부이겠지만 인천 팬들 중에는 저 글귀를 쓴 분의 뜻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글귀가 사라졌습니다. 누가 떼라고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매달았던 분이 직접 떼어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라 밖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16강 토너먼트 진출 이상의 성적을 올린 유일한 감독님에게 저런 글귀는 큰 실례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K리그를 사랑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축구를 갈망하는 축구 팬의 입장에서는 저런 생각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비는 뒷전으로 둔 채 공격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잘 이루어진 재미있는 축구를 추구해주십사 하는 뜻입니다.

내년부터는 인천 유나이티드의 안방이 바뀝니다. 인천 숭의동에 짓고 있는 숭의아레나도 가보았습니다. 그곳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뜁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경기력에서 더 나아지지 못한다면 숭의아레나가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

당장 성적이 올라가서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에 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한 골을 먼저 넣은 뒤 뒷문을 걸어잠그는 축구는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리그 순위표에서 11위쯤에 머물러도 좋으니 팬들이 정말 즐겁게 응원할 수 있는 축구 팀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경기 종료 직후 동쪽관중석 앞으로 다가와 인사하고 있는 인천 선수들 ⓒ 심재철

글: 넷포터 심 재 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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